여행
대구여행ㅡ낙동강승전기념관
대박삼계탕전수
2016. 5. 10. 14:13
대구여행,대구 가볼만한곳으로 오늘은 대구의 앞산전망대 가기전에 만나는 낙동강승전기념관을 소개합니다.
개관은 연중무휴이며, 이용료는 무료다.
입구에는 각종 탱크,비행기,대포등의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네요.
1950년 8월 3일 다부동 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해 한미 연합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당시 국토의 90%를 유린한 인민군에게 낙동강 방어선은 함락해야 할 돌파선이었고, 주요 도시를 잃은 국군과 미군에게는 인민군을 막아야 할 저지선이었다. 1950년 8월 달부터 국군과 인민군은 다양한 전투를 거치며 승리와 패배를 반복하였다. 당시 김일성은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해야 한다는 계획 하에, 포항, 왜관,영천, 진주, 대구 등 주요 방어선의 요충지를 공격함으로써 낙동강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경상북도의 주요 전투지는 포항과 다부동이었다. 포항이 붕괴되면 7번 국도의 주도권이 공산군에게 넘어가서 부산이 점령당할 수 있었고, 다부동이 함락될 시 대구와 영천이 적의 수중에 넘어가게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8월 포항 전투에서 국군이 대패함으로써 포항이 수중에 넘어갔고 영천이 다부동과 함께 점령됨으로써 1기 방어선이 붕괴되었다. 국군과 UN군은 2기 방어선을 짤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
미리 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과 소비에트 연방 스탈린의 협조와 지지를 얻은 김일성은 남로당의 대한민국내 활동과 우방인 소련의 지지에 고무되어 1950년 6월 25일 38도선과 동해안 연선(沿線) 등 11개소에서 경계를 넘어 38선 이남으로 진격하였다. 이는 때마침 냉전으로 긴장되어 있는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바, 파문은 참으로 전에 없던 것이었다.조선인민군의 대공세에 유엔은 미국을 주축으로 바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82호를 의결하고 이 전쟁에서 한국을 원조하기로 결정하고 파병하였다. 하여 7월 7일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조직되었다.[12] 인민군은 무방비 상태였던 중부지방과 호남지방을 삽시간에 휩쓸었다. 연합군은 낙동강방어선에서 배수진의 결전을 전개하였다.[13] 연합군은 더글러스 맥아더의 인천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평양에 이어 압록강 부근까지 이르렀으나, 중국인민지원군이 개입하여 전세가 다시 뒤집히게 되었으며, 그 와중에 남로당의 남한 내부 전복을 위한 활동과 이를 제압하려는 대한민국 정부의 충돌로 거창 양민학살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3년 간 지속된 교전으로 수많은 군인 및 민간인이 사상하였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측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념적인 이유로 민간인들의 학살이 자행되고 지주들의 처벌과 그 보복이 반복되면서 남·북 간의 적대적인 골이 깊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한국휴전협정으로 인하여 설정된 한반도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휴전하였다. 현재까지 서류상으로 휴전 상태로, 협정의 체결 이후에도 쌍방 간에 크고 작은 군사적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
개관은 연중무휴이며, 이용료는 무료다.
입구에는 각종 탱크,비행기,대포등의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네요.
1950년 8월 3일 다부동 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해 한미 연합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당시 국토의 90%를 유린한 인민군에게 낙동강 방어선은 함락해야 할 돌파선이었고, 주요 도시를 잃은 국군과 미군에게는 인민군을 막아야 할 저지선이었다. 1950년 8월 달부터 국군과 인민군은 다양한 전투를 거치며 승리와 패배를 반복하였다. 당시 김일성은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해야 한다는 계획 하에, 포항, 왜관,영천, 진주, 대구 등 주요 방어선의 요충지를 공격함으로써 낙동강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경상북도의 주요 전투지는 포항과 다부동이었다. 포항이 붕괴되면 7번 국도의 주도권이 공산군에게 넘어가서 부산이 점령당할 수 있었고, 다부동이 함락될 시 대구와 영천이 적의 수중에 넘어가게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8월 포항 전투에서 국군이 대패함으로써 포항이 수중에 넘어갔고 영천이 다부동과 함께 점령됨으로써 1기 방어선이 붕괴되었다. 국군과 UN군은 2기 방어선을 짤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
미리 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과 소비에트 연방 스탈린의 협조와 지지를 얻은 김일성은 남로당의 대한민국내 활동과 우방인 소련의 지지에 고무되어 1950년 6월 25일 38도선과 동해안 연선(沿線) 등 11개소에서 경계를 넘어 38선 이남으로 진격하였다. 이는 때마침 냉전으로 긴장되어 있는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바, 파문은 참으로 전에 없던 것이었다.조선인민군의 대공세에 유엔은 미국을 주축으로 바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82호를 의결하고 이 전쟁에서 한국을 원조하기로 결정하고 파병하였다. 하여 7월 7일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조직되었다.[12] 인민군은 무방비 상태였던 중부지방과 호남지방을 삽시간에 휩쓸었다. 연합군은 낙동강방어선에서 배수진의 결전을 전개하였다.[13] 연합군은 더글러스 맥아더의 인천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평양에 이어 압록강 부근까지 이르렀으나, 중국인민지원군이 개입하여 전세가 다시 뒤집히게 되었으며, 그 와중에 남로당의 남한 내부 전복을 위한 활동과 이를 제압하려는 대한민국 정부의 충돌로 거창 양민학살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3년 간 지속된 교전으로 수많은 군인 및 민간인이 사상하였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측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념적인 이유로 민간인들의 학살이 자행되고 지주들의 처벌과 그 보복이 반복되면서 남·북 간의 적대적인 골이 깊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한국휴전협정으로 인하여 설정된 한반도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휴전하였다. 현재까지 서류상으로 휴전 상태로, 협정의 체결 이후에도 쌍방 간에 크고 작은 군사적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