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식

오늘은 정월대보름

정월 대보름은 한국 세시풍속에서 비중이 크고 뜻이 깊은 날이기 때문에 ‘대보름’이라고 특별히 일컫는다. 매우 드물지만 정월 14일을 작은보름, 15일을 큰보름이라고 부르는 곳도 있다. 이날을 상원(上元)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중원(中元, 7월 15일), 하원(下元, 10월 15일)과 연관해서 부르는 한자어이다. 또 이날을 오기일(烏忌日) 또는 달도(怛忉)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래

보름의 유래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紀異)」 사금갑조(射琴匣條)에 나타나 있다. 
까마귀가 소지왕을 인도하여 위급을 면하게 했고, 그 후로 매년 첫 번째 돼지·쥐·말날에는 백사를 삼가고 감히 동작을 아니하며, 15일을 오기일이라 하여 찰밥으로 제사지내니 지금에도 행하고 있다. 속말로 이것을 달도라 하니 슬퍼하고 근심해서 백사를 금기하는 뜻이다. 즉, 오기일과 찰밥으로 까마귀를 제사지내는 관습이 일연(一然)이 살았던 고려 후기에도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인데, 여기에도 찰밥의 유래가 거론되어 있다. 달도라는 말은 여기서는 오기일과 첫 번째 돼지날·쥐날·말날들의 속말로 백사를 삼가는 날로 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경주부조(慶州府條)에서 위 기록을 인용하고, 삼가는 날들을 여기서는 신일(愼日)이라 기록하고 속말로는 달도라 하니 삼간다는 뜻이라고 했다. 이상으로 보면 신일이나 달도는 하나의 특정일을 가리키는 낱말은 아니었다. 그것은 『지봉유설(芝峯類說)』의 “동방 옛 풍속에 세수와 정월 첫 번째 쥐날과 말날, 2월 1일을 신일이라 한다.”는 기록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즉, 이상을 종합하면 세수(歲首, 1월 1일)·첫 번째 쥐날·말날·돼지날·대보름·2월 1일들이 다 신일이고 달도이다. 이 신일이나 달도라는 말들은 이 명절과 뜻있는 날들에 마음이 들떠서 좋아하지만 말고, 삼가고 조심성 있는 마음가짐을 일깨우던 뜻에서 나왔다 하겠다.
정월 대보름에 시행된 의례들을 통해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신라에는 상원 연등의 기록이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에 보이고 있다. 연등은 고려 초부터는 태조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 의해 거국적인 행사로 성행되었다. 고려 초의 상원 연등은 6대 성종 이후 중단됐다가 2월 15일로 복설해서 고려 말까지 계속 되었으나 2월 15일만 고수된 것은 아니었다. 
이 상원 연등은 조선 초에 초파일 연등과 같이 시행되었으나 태조 15년 이후 모두 중단되었다가 초파일 연등은 관등놀이로 민간에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다음에 조선시대 초기의 문헌 기록으로 상원의 내농작(內農作)을 들 수 있다. 『세조실록(世祖實錄)』 9년에 보면 “세속에 매년 상원일에 농가에서 농잠의 모양들을 차리고 한 해 풍년의 징조로 여겼다.”고 민간의 상원 가농작(假農作)의 풍속을 기록한 것이 보인다. 궁중에서도 농가의 가농작을 모방시키고 좌우편을 나누어 경쟁까지 시키니 그것이 민간 풍속에서 온 것임을 말하는 데서 민간의 상원 풍속 기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내농작이 매우 정교해지다가 차차 도를 지나쳐서 폐단이 생기고 중신들 간에 중지 논의가 많다가 중종 말년 이후 궁중에서는 중지된 듯했다. 그러나 민간에서 지금도 전승되고 있으니 이른바 낟가릿대[禾竿]풍속이 그것이다. 신라 오기일, 고려의 연등, 조선시대의 가농작 등은 우연히 기록에 남은 소수의 예일 뿐이고, 이들과 동반해서 대보름의 많은 풍속들이 전승되어 왔다. 그 후의 대보름의 기록은 조선 후기의 세시기류들에 이르러서 매우 상세하게 나타난다.

의례

대보름의 대표적인 행사인 동제는 지금까지도 대보름날을 주로 해서 여신지모신앙(女神地母信仰)을 주류로 하는 고형(古型)의 전통을 지속시켜 왔다. 동제를 지내는 시간을 물으면 노인들은 흔히 자정(子正)이라 했고, 또는 보름달이 중천(中天)했을 때라고 했다. 이러한 대보름의 상징적인 장면은 분명하게 역법이 생기기 이전부터 오늘날까지 유구하게 지켜진 우리의 일관된 역사라고 말할 수가 있다. 달맞이, 달집태우기들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고, 우리나라와 같은 농본국(農本國)에서 농사가 발달하면서 차차 줄다리기 같은 점풍(占風)놀이들도 여기 따라올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대보름 풍속은 더구나 고대 기록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그 성격상 충분히 고대부터 있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정월 대보름에는 많은 의례들이 행해지고 있다. 보통 설에 개인적인 의례들이 행해진다면 대보름에는 마을 공동의 의례들이 행해진다. 마을공동제의는 지역에 따라 부르는 명칭이 달리 나타난다. 동제(洞祭)는 한 마을에 사는 주민들이 지연적인 화합을 다지는 민속의 중요한 핵심이다. 제당의 이름은 산제당·산신당(경기·충청) ·서낭당(강원)·당산(전라·경상)·본향당·포제단(제주도) 등의 지역적 차가 많으나 근원은 다 같은 것이다. 제명은 동제·당제들이 일반적이다. 동제에는 선출된 제관이 축문을 읽는 유교적 정숙형이 제일 많고, 여기에 몇 년 걸이로 무당굿이 따르는 것을 동해안 지역에서는 흔히 별신굿이라고 한다. 그러나 별신굿이라도 하회별신굿은 가면극의 비중이 크고, 은산별신제는 지역과 성격이 또 다르다. 동해안 노무들은 현재 별신굿이라는 것은 ‘어촌의 서낭굿’이고, 풍어제이며 별신굿이란 시장이 경기부양책으로 난장굿과 난장판을 곁들이는 시장굿이 원래 별신굿이라고들 했다. 1930년대 총독부 조사도 『석전·기우·안택』의 시장제 기록에서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상원조(上元條)에 “소경을 불러다가 보름날 전부터 안택경을 읽으며 밤을 세운다. 액을 막고 복을 비는 까닭이다.”고 했다. 근래는 소경 경장(經匠)이 없기 때문에 서울·경기지방에서는 주부가 단골 무당집에 가기도 하고, 집으로 불러서 횡수(橫數)막이라는 간단한 굿을 하기도 한다.
정초부터 대보름 전후에 동네 농악대가 집집을 돌며 즐겁게 놀고 축원해 주는 것을 지신밟기(전국)·매구[埋鬼, 호남]·걸립(乞粒, 중부) 등으로 다양하게 불러왔다. 그러나 평안도·함경도 등 북쪽에는 농악대들이 없었으니 지신밟기도 없었다.
주로 대보름에 마을의 상징인 농기(農旗)와 농악대들이 모여서 그 서열에 따라 인사를 하는 의식이 기세배이다. 전북에서 많이 전승되는데 이때 각 마을의 농악대들이 서로 연주를 뽐내는 농악 경연도 벌어진다. 서열이 불분명해서 서로 먼저 인사하라고 실랑이가 벌어져서 기싸움이 되는 수도 있다. 기싸움은 상대 농기 위의 꿩깃을 빼앗으면 이기는 곳(전북 김제)도 있고, 서로 부딪쳐서 먼저 부러뜨리면 이기는 곳(전북 남원·경남 영산)도 있다.
지금도 14일 밤에 부인들이 붕어나 자라를 사서 강에 놓아 주고 소지(燒紙) 축원을 올리는 일을 많이 볼 수가 있다. 이것을 방생(放生)이라고 한다. 3월 삼짇날, 8월 보름에도 한다. 또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는 “깨끗한 종이에 흰 밥을 싸서 물에 던지는 것을 어부슴[魚鳧施]이라 한다.”고 했다. 글자 뜻으로는 물고기나 오리에게 베푼다는 것인데, 대보름에 액막이를 위해서 하는 일이다.
『동국세시기』 정월 상자일조(上子日條)에 “충청도 풍속에 떼를 지어 횃불을 사르는데 이를 쥐불이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정월 대보름 또는 정월 열나흗날 밤에 많이 한다. 이렇게 하면 논두렁의 잡초와 병충을 없애고, 재가 거름도 되고, 논두렁이 여물어지고 농사가 잘된다고도 한다.
전남 어촌에서는 정월 열나흗날에 풍어를 비는 깃발을 배에 단다. 이것을 “봉기(奉旗)단다.”고 한다. 봉기는 대여섯 발 길이로 각색 물감을 들였고 장대나 또는 돗대 위에 달기도 한다. 이런 깃발은 고기를 많이 잡아오는 만선 때에도 단다고 하니 만선기를 다는 셈이다.

속신

설에는 주로 개인적인 의례로 개인의 건강이나 집안의 안녕을 기원하는 속신들이 행해지는 게 대부분이라면 정월 대보름에는 마을 공동의 기원인 풍년을 기원하는 속신 형태가 많다.
『동국세시기』에 “농가에서 대보름 전날 짚을 묶어서 기 모양을 만들고, 그 안에 벼·기장·피·조의 이삭을 넣어서 싸고 목화도 같이 장대 끝에 매단다. 그것을 집 곁에 세우고 고정시킨 것을 볏가리[禾積]라 하는데 풍년을 기원하는 뜻이다.” 내농작은 이것을 궐내에서 모방했던 것이다. 지금도 각 지방에 적지 않게 전승되고 있다.
정월 열나흗날이나 대보름에 감·대추·배 등 과수의 가지 친 사이에 돌을 끼워 두면 열매가 많이 열린다고 한다. 『동국세시기』의 상원조와 단오조에도 이 기록이 보인다. 지금도 각 지방에 전승한다. 중국과 일본에도 유사한 풍속이 있다.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잘 사는 집 대문 안의 흙을 훔쳐다가 자기 집 부뚜막에 바르는데, 이것을 ‘복토훔치기’라 한다. 또 보름 전날 밤 닭 울기를 기다려서 앞을 다투어 정화수를 길어 온다. 이것을 ‘용알뜨기’라 한다. 맨 먼저 긷는 사람이 그해 농사를 제일 잘 짓는다. 이상은 『동국세시기』의 기록이다. 이것은 물-달-여성-대지의 풍요 원리 연결의 상징이다. 지금도 전승자료가 보인다.

정월 대보름날 밤에 다리[橋]를 밟으면 다리[脚]가 튼튼해진다고 해서 경향 각지에서 성행한다고 옛 세시기들이 다 기록하고 있다. 지금 서울에서는 그 성행처이던 수표교·광통교들이 없어지고 지방 자료가 가끔 눈에 띈다.
정월 열나흗날과 대보름에는 모든 행동을 아홉 차례씩 한다는 관습이 많다. 나무 아홉 짐, 새끼 아홉 발을 꼬면 큰 부자가 된다고 한다. 부인은 빨래 아홉 가지, 학생은 글 아홉 번, 글씨 아홉 줄을 쓰라는 것은 모두 부지런하라는 뜻이다.
정월 대보름 내에는 가능한 한 곡식을 밖에 내지 않는다. 복(福)을 더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쌀 반출을 금한다. 돈이 필요해도 대보름 전에는 내다 파는 일은 삼간다. 
정월 대보름에는 기풍과 관련된 점복이 많이 행해진다. 풍년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그해에 풍년이 들 것인지를 미리 점쳐보게 되는데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보름날 초저녁에 높은 곳에 올라서 달맞이를 하고 점을 친다. 달빛이 붉으면 가물 징조이고, 희면 장마가 길 징조이다. 달의 사방이 짙으면 풍년이고, 옅으면 흉년이 들 징조이다. 또 보름달에게 소원을 빌기도 한다. 농군은 농사가 잘되기를, 총각은 장가 가기를, 부인들은 아들 낳기를 기원한다.

달과 관련된 풍속으로 청소년들이 짚이나 솔잎, 나무들을 모아서 언덕 위에 쌓고 조그만 오두막이나 큰 다락 등의 달집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는 달이 뜨기를 기다려서 불을 지르고 환성을 지른다. 달집 속에 대나무들을 넣어서 터지는 폭음으로 마을의 악귀를 쫓기도 한다. 달집이 탈 때 고루 잘 타오르면 풍년이고, 다 타고 넘어질 때 그 방향과 모습으로 흉풍을 점치기도 한다.
대보름날 밤 사발에 재와 그 위에 여러 가지 곡식의 씨를 놓고 그 사발을 지붕 위에 올려놓는다. 다음날 아침 날아간 곡식은 흉작, 남은 곡식은 풍작이 된다고 점을 친다. 콩을 통해 농사의 풍흉을 점쳐 보기도 한다. 대보름 전날 저녁에 콩 열두 알의 표시를 하여 수수깡 속에 넣고 묶어서 우물에 넣었다가 대보름날 아침에 그 콩알들이 붇고 안 붇는 것으로 그달의 수해·한해·흉풍·길흉을 점친다. 이것을 ‘달불이’라 한다. 또 동네 안의 호수대로 호주의 표시를 한 콩으로 위와 같이 각 가정의 점을 치는 것을 ‘집불이’ 혹은 ‘호불이’라 한다. 간단한 방법이기 때문에 지금도 많이 전승되고 있다.
또 소에게 음식을 주고 그것을 통해 점을 치기도 한다. 대보름 전날 밤에는 하루 세 끼 먹는 소에게 한 번 더 준다. 오곡밥도 쇠죽에 섞어서 주고 소가 쌀을 먼저 먹으면 쌀 풍년, 콩을 먼저 먹으면 목화 풍년 등으로 점을 친다. 또 대보름날에는 외양간 앞에 상을 차리고 일년 내내 소가 일 잘하기를 기원한다. 지금까지 전국적으로 널리 전승되고 있다. 닭이 우는 횟수를 가지고 점을 치기도 한다. 대보름날 새벽에 첫닭 우는 횟수를 센다. 횟수가 적으면 흉년, 열 번 이상을 울면 풍년이 된다고 한다. 정초의 토정비결 등은 개인 운수점이 주가 되고 대보름에는 농사점이 주가 되는데 농사점은 이 밖에도 다양하다.

이 밖에도 개인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는 풍속이 행해졌다. 즉 액을 막아내기 위한 액막이의 형태가 그것이다. 제웅치기의 풍속은 액막이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나이를 따라 그 운명을 맡는 9종의 별이 각기 9년 만에 드는데 남자는 10세, 여자는 11세부터 흉한 제웅직성이 먼저 든다. 이 해에는 화나 병이 생길 수 있어 그 액풀이로 ‘제웅치기’를 한다. 짚인형을 만들어 속에 돈이나 쌀을 넣고 그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적는다. 이 제웅을 대보름 전날 초저녁에 길에 버리면 주워가는 사람에게 액이 옮아간다는 것이다. 제웅을 한자로 ‘처용(處容)’이라고 적고 있다.
‘액막이연’이라 하여 정초부터 날리던 연을 대보름날에는 날려 보낸다. 이때 연에 ‘송액(送厄)’ 또는 ‘송액영복(送厄迎福)’ 등의 글귀를 써서 하늘 높이 띄우고, 연줄을 끊는다. 연은 한없이 날아가 버리고, 그 연의 주인이 지닌 액은 다 사라진다고 한다.
대보름날 아침에 더위팔기를 한다. 이날 아침에 사람을 보면 급히 이름을 부른다. 대답하면 곧 “내 더위 사가라.” 한다. 이것을 ‘더위팔기’라 하고 이렇게 하면 그해에는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대보름날은 개에게 밥을 주지 않는다. 이를 ‘개보름쇠기’라고 하는데 이날 개에게 밥을 주면 여름에 파리가 끼고 마르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속담에 굶는 것을 “개 보름쇠듯 한다.”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은 지금도 많이 사용한다.
‘월천공덕(越川功德)’이라 하여 그해 운수가 나쁜 사람은 짚으로 섬이나 작은 오쟁이를 만들고, 안에 돌이나 흙을 넣되 더러는 돈을 넣기도 한다. 이것을 열나흗날 저녁에 남모르게 개천에 디딤돌로 놓는데, 이 일을 다리[橋] 공드린다고 한다. 다음날 아이들이 오쟁이를 발견하면 돈을 가져가기도 한다.
구충(驅蟲)을 위한 풍속도 많이 행해진다. 대보름날 새벽에 마당에 짚불을 놓으며 이것을 ‘모깃불’이라 한다. 목적은 시골 여름철의 모기 성화를 미리 쫓는다는 것인데, 여기에 참대나 아주까릿대를 넣어서 마디가 튀는 소리로 잡귀를 쫓는다는 경우도 있다.

절식

정월 대보름의 시절음식은 시절음식으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속신적인 부분과 많은 연관을 지니고 있다. 귀밝이술[耳明酒]은 대보름날 아침에 데우지 않고 찬 귀밝이술을 한 잔 마시는데 이에는 귀가 밝아진다는 의미 외에 일년 내내 좋은 소식만을 들을 수 있다는 의미도 있다. 부럼깨기 풍속도 마찬가지이다. 『동국세시기』에 “상원 이른 아침에 날밤·호두·은행·무 등을 깨물면서 일년 열두 달 무사태평하고 부스럼이 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고 축수하니 이것을 이굳히기[固齒之方]라고 한다.”고 했다. 이굳히기는 중국·일본에서도 널리 전해 왔으며 설날에 행해지고 있다. 부럼은 지금도 전국적으로 성행된다.

정월 대보름날을 전후해서 찰밥과 약밥을 먹는 풍속이 있다. 찹쌀을 쪄서 대추· 밤·기름·꿀·간장을 섞어서 함께 찌고 잣을 박은 것을 약밥[藥飯]이라고 한다. 이것은 대보름의 좋은 음식이고, 이것으로 제사를 지낸다. 찰밥[糯飯]에 더 공을 들인 것이 약밥이 되는데 전남에서는 찰밥이나 약밥은 시루에 쪄서 성주께 올리기 때문에 성주밥 또는 시리(시루)밥이라고도 한다.

전남에서는 지금도 상원에 보리밥을 나물들과 함께 그릇에 담아서 볏짚가리나 담 위에 얹어 까마귀를 대접한다. 까마귀가 와서 먹는 일은 보기 어렵고 옛 관습대로 농사를 위해서 까마귀밥을 차린다고 한다. 전북에서도 약밥을 까마귀나 까치가 먹으라고 밖에 내놓은 것을 까마귀제사지낸다고 한다. 충북에서도 같은 보고가 있다. 제주도에서는 조상 제사 때에 으레 까마귀가 찾아오는 것으로 알고, 정식으로 모셔야 될 사람이 모셔지지 못한 제사를 “까마귀 모른식개(제사)”라고 하는 속담도 있다. 까마귀는 후대에는 불길한 새가 되었지만, 상대(商代)에는 태양의 상징이기도 한 영조(靈鳥)였다. 『삼국유사』 이래의 오기일의 까마귀제사, 까마귀밥들은 그러한 상대의 까마귀 모습의 한 잔영이다.

『동국세시기』 상원조에는 “오곡으로 잡곡밥을 지어 먹는다. 또 이것을 나누어 준다. 영남지방의 풍속도 그런데, 종일 이 밥을 먹는다.”고 했다. 그러나 경기도에서는 오곡밥을 열나흗날 저녁에 일찍 먹는다. 전남에서도 열나흗날 저녁에 오곡밥이라고 해서 농사지은 곡식을 모두 섞어서 밥을 짓는다고 한다. 14일 저녁을 일찍 많이 먹고 15일 아침도 일찍 먹는데, 이것은 일년 내내 부지런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정월 열나흗날에는 세성받이집의 밥을 먹어야 운수가 좋다고 한다. 이를 ‘세성받이밥’이라 한다. 그래서 저녁을 늦게 지으면 먹을 사람을 이웃에 뺏기기 때문에 일찍 지어서 오후 2시도 되기 전에 저녁 초청을 하는 수도 있다. 결국 열나흗날의 오곡밥은 서로 이웃집으로 돌아다니면서 먹기도 한다. 한편 『동국세시기』는 “어린이가 봄을 타서 야위면 대보름날 백 집의 밥을 빌어다가 절구를 타고 개와 마주 앉아서 개에게 한 숟갈 먹이고 자기도 먹으면 다시는 그런 병이 없어진다.”고 했다. 이를 ‘백가반(百家飯)’이라 한다. 전남에서는 이것을 조리밥 또는 세성받이밥이라고 해서 열나흗날 저녁, 대보름날 아침에 아이들이 체나 조리로 보름밥을 얻으러 다닌다. 경남에도 같은 풍속이 있다. 특히 더위를 안 먹고, 몸에 좋다고 해서 한다.

정월 대보름에는 묵은나물과 복쌈을 먹는 풍속이 있다. 호박고지·무고지·가지나물·버섯·고사리 등을 여름에 말려 두었다가 대보름날 또는 정월 열나흗날에 나물로 무쳐 먹으면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한다. 또 김이나 취로 밥을 싸서 먹는 것을 ‘복쌈’이라고 한다. 이들은 다 오곡밥의 반찬으로 풍성하게 담아 먹는 것이다.

또 경남에서는 대보름날 조반의 반찬으로 반드시 청어를 구어 먹는 풍속이 있다. 이날 구운 청어를 먹지 않으면 “비리가 오른다.”고 하는데, 이것은 살이 오르지 않고 마른다는 뜻이다. 또 이날 조반에 생두부를 먹으면 그해 살이 찐다고 일부러 이것을 먹는 사례도 있다.(1972년 보고) 두 사례가 다 오늘날 도시와는 반대로 살이 찌기를 바라는 풍속이다. 이외에도 평남 순천에서는 대보름날 국수발 같이 명이 길어지라는 뜻에서 명길이 국수를 먹는다고 한다.

놀이방법

정월 대보름에는 주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놀이들이 행해진다. 이때의 놀이들은 단순히 유희와 오락의 의미만이 아니라 주로 승패를 가르는 놀이로 농사의 풍흉을 예견하기도 한다.
줄다리기는 편싸움의 대표 종목의 하나이고, 역시 대개 대보름 밤에 거행된다. 줄다리기의 종류에는 아이들 골목 줄다리기에서 어른 줄다리기, 마을 줄다리기에 대해서 고을 줄다리기라 할 것들도 있다. 그 종류에 따라서 진행 과정도 다양하고 내용도 복잡 다양해진다.
고싸움놀이는 줄다리기의 한 전초전으로서 최근까지 전남의 장흥·강진·영암 등에서 대보름 줄다리기에 앞서서 행해졌다. 이것은 보통 줄다리기의 줄 머리부분의 둥근 고를 맞대어 상대방을 깔고 누르면 이기는 것이다. 이것이 끝나면 두 고를 연결해서 본격적인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광주광역시 남구 칠석동에서는 고싸움놀이가 독립해서 하나의 놀이로 발전하고 있다.
전남 장흥군 장흥읍의 ‘보름줄다리기’는 줄의 첫 멜대와 둘째 멜대 위에 5~6층의 대나무 난간을 만들어서 수십 개의 청사초롱으로 불을 밝히고 지방의 유지와 기생도 줄 위에 타고 행진하는 호화로움이 있다. 먼저 고싸움을 하고 나서 줄다리기가 이어지는 전남 지역의 한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나무쇠싸움은 ‘쇠머리대기’라로도 한다. 경남 창녕군 영산 한 곳에만 있는 대형 민속놀이로 본래 대보름 행사였으나 지금은 3·1절에 거행되고 있다.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당시의 나무쇠의 길이는 495센티미터, 높이는 385센티미터였다. 동서부의 두 나루쇠가 부딪칠 때에 상대방을 밀고 누르면 이기는 단순하나 격렬한 승부법은 고싸움이나 차전놀이와 유사하다.
차전놀이는 ‘동채싸움’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경북 안동에만 전승하는 대보름의 대형 민속놀이이다. 수백 명 장정의 머리꾼들이 팔짱을 끼고 어깨로 밀고 나가는 뒤로 동채꾼들이 메는 동채 위에 탄 대장의 지휘로 전진 후퇴를 하다가 적의 동채를 눌러서 땅에 대면 이기는 승부이다.
석전(石戰)은 두 편으로 갈라서 돌을 던져서 싸우고, 이기는 편에 풍년이 온다고 했던 대보름의 편싸움놀이다. 한·중·일에 다 있었고, 한국은 고구려에서부터 역사상 기록도 많았으며, 전국적으로 성행하다가 1930년대에는 소멸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횃불싸움은 대보름날 밤 횃불을 들고 놀다가 고함을 지르며 이웃 동네에 시비를 걸면서 치고 때리고 옷도 태우는 싸움이다. 승부는 횃불을 뺏기거나 꺼지거나 후퇴하는 편이 지게 된다.
놋다리밟기는 절정을 이루던 부인들의 놀이이다. 허리를 구부리고 앞사람의 허리를 잡고 지은 열 위를 성장한 공주가 양쪽 시녀의 부축을 받아 노래에 맞춰서 걸어간다. 때로는 이런 패가 몇 개씩 어울리기도 하고, 곳에 따라서는 기마전 같은 격렬한 싸움도 있었다. 놋다리밟기는 경북 안동뿐만 아니라 전북에도 있었다.
대보름 전후의 농촌 놀이에 사자춤이 있다. 함경도 북청에서는 동네마다 사자춤이 있어서 유명하다. 사자는 백수의 왕으로 동네의 잡귀를 쫓고 안과태평을 빌었다. 사자춤은 중국·일본에도 많고, 사자는 부처님 사자(使者)로 여겨지며, 봉산탈춤 등에도 나오고 있다. 북청군 토성리에서는 대보름의 액막이로 사자놀음과 함께 관원놀음도 했다. 조선시대 각급 관원들 수십 명의 가장 행렬과 악대가 호화로웠다. 경북의 여러 고을에서도 서당의 청소년들이 원님이나 육방관속으로 분장시켜서 이루어지는 모의재판이나 가장행렬을 정월이나 여름철 한가한 때에 거행하였다.
경상도 일대 부산진·동래·수영 등에서는 들놀음이라 하고 통영·고성 등에서는 오광대라 부른다. 이들 가면극의 연희 시기도 처음에는 정월 14일이나 15일 밤이었다. 통영처럼 제야에 탈놀이와 매구를 쳤고, 대보름까지는 민가를 돌며 매구를 치고 중광대가 나와서 잡귀를 쫓았으나, 후에는 3·4월의 봄놀이, 9월의 단풍놀이에 오락적 연희가 되었다.

금기(禁忌)

대보름 금기는 농경사회에서 요구되는 기본적인 조건, 즉 무병이나 풍농 등을 보장받기 위해 행하는 상징적 형태의 행위이다. 가령 경북 고령군에서는 김치를 먹지 않는다. 김치의 산성이 입안을 ‘탁탁’ 쏘는 것처럼 김치를 먹으면 벌이 ‘탁탁’ 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충북 청원군에서는 키 작은 사람이나 아이들의 출입을 삼간다. 삼이 잘 자라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키 큰 사람을 초대하여 융숭하게 대접하기도 한다. 이렇게 대보름 금기는 닮은 것은 닮은 것을 낳는다든지, 결과는 그 원인을 닮는다는 유감주술(類感呪術)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전국에 걸쳐 전승되고 있는 대보름 금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먹는 것과 관련된 금기이다. 김치를 먹으면 살쐐기(여름철에 생기는 피부병의 한 가지로서 가렵고 따끔거림. 흔히 몸쐐기라고 함.)가 온 몸에 인다고 여긴다. 또 풀쐐기(불나방의 유충으로 누에와 비슷함. 온몸에 거친 털이 빽빽하며 몸빛은 검푸름.) 또는 벌에게 쏘인다고 여긴다. 그리고 발바닥에 가시가 배긴다고도 하고 논밭에 잡초가 무성해진다고 여기기도 한다. 또 “얼굴에 검버섯이 핀다.”, “손가락에 보풀이 생긴다.”, “이(치아)가 상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백김치를 먹으면 “머리가 센다.”고 하고 동치미를 먹으면 “못자리에 이끼가 낀다.”고 여긴다. 따라서 김치뿐만 아니라 깍두기 내지 김치국도 일절 먹지 않는다. 그리고 음식을 조리할 때에도 고춧가루를 넣지 않는다. 한편 살쐐기가 일 경우에, 측간에 있는 짚을 그슬려 깨와 함께 볶은 후 환부에 바르면 낫는다고 한다. 
먹는 것과 관련된 것으로 “찬물을 먹지 말라.”는 금기가 있다. 대보름에 찬물을 마시면 여름내 더위를 먹고 놉(날품을 제공하고 보수를 받는 사람)을 얻어 일을 할 때마다 소나기가 오기 때문에 찬물을 마시지 않는다. 특히 찬물을 많이 마시면 논둑이 터진다고 여긴다. 또 타인이 와서 물을 마시면 모를 심을 때 비가 오지 않는다고 여긴다. 뿐만 아니라 숭늉을 마시면, 정신이 흐리멍덩해지며, 게으름을 피운다고 여긴다. 따라서 물 대신 챗국이나 맑은 콩나물국을 마신다. 그 밖에 물을 길어 오거나, 오수(汚水)를 버리면 논둑이 터진다고 여긴다. 
또 “비린 것을 먹지 말라.”는 금기가 있다. 생선과 같은 비린 것을 먹으면, 여름에 파리가 들끓고 몸에 부스럼이 생긴다고 여긴다. 이외에도 “나물을 먹지 말라.”고 하는데 첫술에 나물을 먹든지 또는 나물을 많이 먹으면, 논밭에 잡초가 무성해진다고 여긴다. 
둘째는 행위와 관련된 금기가 있다. 보름밥을 나물과 비벼 먹으면, 논밭에 잡초가 무성해진다고 여긴다. 또 보름에는 개에게 밥을 주지 않는데 개에게 밥을 주면, 여름내 비실비실 잠만 잔다고 여기고 개 주위에 파리가 들끓는다고 여긴다. 만약 이날 숟가락으로 밥을 먹으면, 두레를 결성하여 공동으로 김을 맬 때 밭고랑 넓은 것을 담당한다고 여긴다. 따라서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다. 다만 새댁의 경우에만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다. 또 칼질을 하면, 논밭에 노래기(절지동물, 노래기강의 총칭)가 들끓고 논둑이 무너진다고 여기며 농우(農牛)가 등창을 앓는다고 여긴다. 또 한 해의 복도 잘라지고, 곡식도 잘라진다고 여기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칼질을 하다 손을 베면, 일년 동안 낫지 않는다고 여긴다. 따라서 14일 밤에 미리 음식 재료를 손질해 두는 등 일체의 칼질을 삼간다. 남의 집 출입을 금하기도 한다. 이때는 키가 작은 사람을 농작물과 연관시켜 생각하는데 키가 작은 사람이 먼저 출입하면 삼이 잘 자라지 않는다고 여긴다. 따라서 키 작은 사람이나 아이들의 출입을 금한다. 더러 키 큰 사람을 초대하여 융숭하게 대접하기도 한다. 한편 여성이 먼저 출입하면, 가장이 구설수에 오른다거나 닭이 부화를 많이 못 한다고 하고 논둑이 터진다고 여긴다. 따라서 가정 내에서도 남성이 먼저 일어나 집안을 한 바퀴 돈 다음에야 여성들이 활동을 시작한다. 여성들은 오전이라도 가능한 한 외부의 출입을 삼간다. 
대보름날 오전에는 마당을 쓸지 않는다. 오전에 마당을 쓸면 한 해 복이 나간다고 여긴다. 따라서 마당을 쓸지 않는다. 그래도 혹 쓸어야 할 경우에는, 해가 중천에 솟은 다음에 쓴다. 이때에도 비질을 마당 안쪽으로 향해 하며, 쓰레기는 집 밖으로 버리지 않는다. 또 빗질을 하지 않아야 하는데 머리를 빗으면, 콩밭에 새삼이 무성하게 자라 밭농사를 망친다, 집안에 뱀이 들끓는다, 머리에 비듬과 이가 많이 생긴다, 집안에 곰팡이가 많이 생긴다, 집안의 복을 쓸어낸다고 여긴다. 그리고 음식에 머리카락이 들어가면 한 해 재수가 없다고 여긴다. 따라서 빗질뿐만 아니라 아예 머리를 감지 않는다. 특히 비가 올 때 머리를 감으면 부모상을 당한다고 여겨 삼가 주의하였다. 
그리고 빨래를 하지도 않는다. 빨래를 하면 나락이 말라 버린다고 여긴다. 빨래를 널면, 논에서 황새가 놀아 논농사를 망친다, 나락이 병충해로 인해 하얗게 변한다, 특히 옥수수 밭의 지질이 변한다고 여긴다. 
이날은 맨발로 걷지 않아야 하는데 맨발로 걸으면, 발가락이 튼다, 무좀이 생긴다, 그해에 짐승에게 물린다, 농사철에 가시가 박힌다고 여긴다. 따라서 반드시 양말을 신고 다닌다. 잠을 잘 때에도 버선이나 양말을 신고 잔다. 또 생인손(손가락 끝에 염증이 생겨 곪거나, 손톱이 빠지기도 하는 증상)을 앓고 농사철에 가시가 박힌다고 하여 바느질을 하지 않는다. 이 밖에도 논밭의 둑이 무너지고 두더지가 밭을 헤친다고 절구질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논밭의 곡식을 노루가 망친다고 여겨 작두질을 하지도 않는다. 또 이불을 덮고 자면, 논에 물이끼가 두텁게 낀다고 여긴다. 
과학이 부재하고 또 의학이 보급되지 않았던 상황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재액을 대비할 만한 근본적인 대책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주술적인 힘을 원용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민간에서는 정월 대보름을 기해 해마다 반복되는 재액이 다시는 도래하지 않기를 금기형 유감주술에 의지하여 염원하였다. 이러한 대보름 금기를 통해 농경사회에서 염원했던 기원의 일단 및 민중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대보름 금기에 민중들이 향유했던 속신(俗信) 및 생활문화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문화의 총체적인 탐구를 목적으로 하는 한국학의 영역에 있어, 대보름 금기 항목이 차지하는 문화적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의의

정월 대보름은 달을 표준으로 삼던 원초의 태음력(太陰曆)에서 일년 열두 달 중 첫 보름달이 뜨는 날이다. 그래서 지금도 대보름날은 설날처럼 여기는 풍속이 많이 남아있다. 이것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상원조에 “이날 온 집안에 등잔불을 켜 놓고 밤을 새우고 마치 섣달 그믐날 수세(守歲)하는 예와 같다”고 적고 있다. 원래 달은 음(陰)으로 달-여성-대지 등을 상징함으로써 풍요기원의 원리를 형성하고 있다. 이를테면 만월(滿月) 때에 여신에게 대지의 다산 또는 풍요를 기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