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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대구여행ㅡ경남감영공원

감영은
조선시대 각 도의 감사(監司: 觀察使, 從二品)가 정무(政務)를 보던 관아(官衙)이다. 당시에는 감사가 문무(文武)의 실권(實權)을 쥐고 있었으므로, 감사가 있는 영문(營門)이라는 뜻에서 감영(監營)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8도 감영의 소재지는 경기도(京畿道)는 한성(漢城) 돈의문(敦義門) 밖에 있었으나, 1618년(광해군 10)에 영평(永平)으로 옮겼으며, 충청도(忠淸道)는 1395년(태조 4)에 공주(公州)에 두었다가 후에 충주(忠州)로 옮겼고, 1602년(선조 35)에 공주로 옮겼다가 다시 충주로 옮겼다. 경상도(慶尙道)는 상주(尙州)에 두었다가 1601년(선조 34)에 대구(大丘)로 옮겼으며, 전라도(全羅道)는 전주(全州)에, 황해도(黃海道)는 해주(海州)에, 강원도(江原道)는 원주(原州)에, 함경도(咸鏡道)는 함흥(咸興)에, 평안도(平安道)는 평양(平壤)에 두었다.

감영(監營)의 관원은 한 도의 행정과 군사 최고책임자인 관찰사와 함께, 관찰사를 보좌하는 임무를 띠고 중앙에서 파견된 경력(經歷: 正三品), 도사(都事: 從五品), 판관(判官: 從五品) 등과 그 지역의 토착민을 임명하는 이예직(吏隷職) 등이 있었다.

필요한 경비는 관둔전과 늠전에서 충당하였으며, 각 감영별로 관둔전 20결, 늠전 80결, 공수전 15결과 노비 450명(전라·함경 600) 및 공장(工匠: 경기 1명, 충청 19명, 경상 39명, 전라 19명, 강원 22명, 황해 19명, 함경 6명, 평안 11명)을 지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