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근대역사관을 소개합니다.
남포동이나 국제시장 깡통시장을 구경하셨다면 함께 둘러보셔도 좋을듯하네요.
일제강점기와 개화기 그리고 근현대사의 역사적모습을 느낄수 있는 곳입니다.
부산근대역사관은 1929년(일제시대)에 지어진 건물로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점으로 사용됬다더군요.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치한 식민지 착취기관이죠.
액의 보급을 시행하고 한국정부는 사업용지의 일부를 제공하기 위하여 국유지를 출자함으로써 한국이 자원개발 식산진흥을 담당하게 하며, 일본으로부터 선량 근면하고 경험이 풍부한 농민을 이식하고 진보된 농법을 시범함과 동시에 기업가에 대해서도 이자가 싼 자금을 공급하여 식산사업에 이바지하게 한다는 명목으로 설립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을 식민지화할 목적으로 창립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회사가 설립되자 한국정부로부터 토지 1만 7714정보를 출자받고, 1913년까지 토지 4만 7148정보를 헐값으로 매입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이후인 1920년 말에 회사 소유지는 경작지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9만 7천여 정보에 달하였다. 이와 더불어 일제는 국유지를 강제로 불하하여 막대한 면적의 산림지를 가로채어, 1942년 말 16만여 정보의 임야를 소유하였다.
이와 같이 강제로 빼앗은 토지를 소작인에게 빌려주어 50%가 넘는 고율의 소작료를 징수하고, 영세 소작농에게 빌려준 곡물에 대해서는 20% 이상의 고리를 추수 때 현물로 거둬들였다.
또한 그 소유지는 일본인 이주자에게 싼값으로 양도되어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의 직영지 면적은 점차 감소되었으나, 1937년 동척이 직접 경영한 경작지 면적은 6만여 정보에 달하였다. 동척의 농업이민정책은 경제적인 목적보다 정치적인 목적에서 추진되었다.
일본은 각종 특혜를 주고 1910∼1926년에 17회에 걸쳐 일본인 이민 희망자 약 1만 명을 엄선하여 조선침략의 담당자로 활용했다. 이들 이주민은 경기·경상·전라·황해·충청도에 가장 많았는데, 그들은 조선민중을 착취 압박한 일제의 대변자이며 앞잡이가 되었다. 이에 따라 1926년까지 조선인 빈농 약 29만 9천이 토지를 상실하고 북간도로 이주하였다.
한편, 동척은 조선민중에 대한 가혹한 착취로 세력이 확대되자, 1917년 회사법을 개정하여 본점을 도쿄[東京]로 이전하고 조선에만 국한하던 침략 및 착취의 대상과 범위를 몽골·러시아령 아시아·중국·필리핀 및 말레이반도까지 확장시켜 대륙에 대한 침략자금의 공급, 기타 척식사업을 경영하였다.
동척의 사업지역이 중국의 둥베이[東北]·네이멍구[內蒙古]로 확대되었으나, 조선에서의 동척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야기한 이후 일제가 한반도를 그들의 병참기지화하기 위해 중공업에 집중 투자하자, 동척도 광공업 부분에 관심을 기울여 전기·탄광·제철 등 각 분야에 투자하였으나, 여전히 동척의 사업 중심은 조선의 농업에 대한 수탈이었다.
1920, 1930년대 농민의 격렬한 소작쟁의는 동척의 조선민중에 대한 수탈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또한 1926년 12월 28일 의열단원 나석주 열사가 동척을 기습하여 폭탄을 투척하는 사건은 바로 이러한 민족적 증오의 한 표현이었다.
1층엔 영상실이 있어 영상실에서 영상과 함께 부산의 역사를 설명들을수 있어 도움이 되네요.
기차길과 세탁소,빵집,가구점등의 거리를 재현해 놓았네요.
한동안 없어졌던 영도대교 도강이 몇해전부터 다시 재현되고 있네요.
12시부터 약 15분간 이었는데 2시로 변경 운영되고 있죠.
그 밑거름엔 온국민의 피와땀이,학생들의 외침이 함께 했음을 알수 있죠.
남포동이나 국제시장 깡통시장을 구경하셨다면 함께 둘러보셔도 좋을듯하네요.
일제강점기와 개화기 그리고 근현대사의 역사적모습을 느낄수 있는 곳입니다.
부산근대역사관은 1929년(일제시대)에 지어진 건물로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점으로 사용됬다더군요.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치한 식민지 착취기관이죠.
액의 보급을 시행하고 한국정부는 사업용지의 일부를 제공하기 위하여 국유지를 출자함으로써 한국이 자원개발 식산진흥을 담당하게 하며, 일본으로부터 선량 근면하고 경험이 풍부한 농민을 이식하고 진보된 농법을 시범함과 동시에 기업가에 대해서도 이자가 싼 자금을 공급하여 식산사업에 이바지하게 한다는 명목으로 설립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을 식민지화할 목적으로 창립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회사가 설립되자 한국정부로부터 토지 1만 7714정보를 출자받고, 1913년까지 토지 4만 7148정보를 헐값으로 매입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이후인 1920년 말에 회사 소유지는 경작지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9만 7천여 정보에 달하였다. 이와 더불어 일제는 국유지를 강제로 불하하여 막대한 면적의 산림지를 가로채어, 1942년 말 16만여 정보의 임야를 소유하였다.
이와 같이 강제로 빼앗은 토지를 소작인에게 빌려주어 50%가 넘는 고율의 소작료를 징수하고, 영세 소작농에게 빌려준 곡물에 대해서는 20% 이상의 고리를 추수 때 현물로 거둬들였다.
또한 그 소유지는 일본인 이주자에게 싼값으로 양도되어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의 직영지 면적은 점차 감소되었으나, 1937년 동척이 직접 경영한 경작지 면적은 6만여 정보에 달하였다. 동척의 농업이민정책은 경제적인 목적보다 정치적인 목적에서 추진되었다.
일본은 각종 특혜를 주고 1910∼1926년에 17회에 걸쳐 일본인 이민 희망자 약 1만 명을 엄선하여 조선침략의 담당자로 활용했다. 이들 이주민은 경기·경상·전라·황해·충청도에 가장 많았는데, 그들은 조선민중을 착취 압박한 일제의 대변자이며 앞잡이가 되었다. 이에 따라 1926년까지 조선인 빈농 약 29만 9천이 토지를 상실하고 북간도로 이주하였다.
한편, 동척은 조선민중에 대한 가혹한 착취로 세력이 확대되자, 1917년 회사법을 개정하여 본점을 도쿄[東京]로 이전하고 조선에만 국한하던 침략 및 착취의 대상과 범위를 몽골·러시아령 아시아·중국·필리핀 및 말레이반도까지 확장시켜 대륙에 대한 침략자금의 공급, 기타 척식사업을 경영하였다.
동척의 사업지역이 중국의 둥베이[東北]·네이멍구[內蒙古]로 확대되었으나, 조선에서의 동척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야기한 이후 일제가 한반도를 그들의 병참기지화하기 위해 중공업에 집중 투자하자, 동척도 광공업 부분에 관심을 기울여 전기·탄광·제철 등 각 분야에 투자하였으나, 여전히 동척의 사업 중심은 조선의 농업에 대한 수탈이었다.
1920, 1930년대 농민의 격렬한 소작쟁의는 동척의 조선민중에 대한 수탈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또한 1926년 12월 28일 의열단원 나석주 열사가 동척을 기습하여 폭탄을 투척하는 사건은 바로 이러한 민족적 증오의 한 표현이었다.
80년대엔 미문화원으로 사용되다 방화사건 이후 시민의 품으로 돌아와 지금의 부산근대역사관으로 되었다는군요.
괸람시간은 오전9시부터 오후6시까지이며 1월1일과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네요.
3층으로 구성된 전시공간이며 4층은 기획행사가 있을때만 개방이 된다네요.
1층엔 영상실이 있어 영상실에서 영상과 함께 부산의 역사를 설명들을수 있어 도움이 되네요.
2층관람실은 조선의 착취를 위해 설립되었던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지점들의 모습과 그때의 서류들과 각종 자료들을 볼수 있는 곳이구요.
3층은 부산의 근대거리를 재현한 공간이네요.
기차길과 세탁소,빵집,가구점등의 거리를 재현해 놓았네요.
이 사진은 대구의 명물 혹은 상징인 영도다리의 마지막 도강장면이랍니다.
한동안 없어졌던 영도대교 도강이 몇해전부터 다시 재현되고 있네요.
12시부터 약 15분간 이었는데 2시로 변경 운영되고 있죠.
어려운 시기를 견디고 눈부시게 발전한 우리나라...
그 밑거름엔 온국민의 피와땀이,학생들의 외침이 함께 했음을 알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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